[김문호의 스포츠카페] '스테로이드 복용=하루 80개피 담배'
세상이 참 묘하게 돌아간다. 최소한의 도덕조차 무시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와 내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염치고 뭐고 없다. 체면이란 게 어설픈 사치처럼 느껴진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뭐 다 그런게 아니냐'고 하면 초장부터 할 말도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이번 일만큼은 짚고 넘어가야 겠다. LA 다저스 매니 라미레스 얘기다. 단순히 매니가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50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다는 것을 되새김질 하자는 게 아니다. 매니가 스테로이드의 힘을 빌어 500홈런을 치고 다저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정말 허탈하다. 지난 여름 매니가 보스턴에서 옮겨 온 후로 LA팬들은 얼마나 매니에 매료됐던가. 다저스가 그 동안 가져보지 못한 강타자라고 너나없이 환호하지 않았던가. 득점 찬스다 싶으면 여지없이 한 방 시원하게 담장너머로 때려내는 장거리포에 전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LA를 대표하는 '할리우드'가 '매니우드'로까지 둔갑했겠는가. 하지만 매니는 분명 반칙을 했다.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중징계도 내려졌다. 매니는 '의사가 준 처방약을 먹었을 뿐'이라고 일단 발뺌을 했지만 벌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한 걸로 봐서 스테로이드 사용을 인정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문제는 매니가 아니고 다저스 팬들이다. 지난 7일 워싱턴전을 앞두고 불거진 매니 약물 소동 후 나타난 다저스 팬들의 반응은 시쳇말로 '약 좀 먹으면 어때. 야구만 잘하면 되지'식이다. 한 술 더 떠 '야구판에 어디 약 먹고 힘쓰는 선수가 매니 뿐이냐'고 두남둔다. '배리 본즈 로저 클레멘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제이슨 지암비 미겔 테하다 등 모두가 '약발'로 치고 달렸는데 매니가 스테로이드 좀 했기로서니 뒤늦게 광분할 이유도 없다'는 논리다. 여전히 '안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본즈나 클레멘스에 비하면 징계를 받아들였으니 차라리 양질 아니냐'고까지 한다. '샌프란시스코 팬들은 거짓말하는 본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는데 조용히 반성문을 쓰고 있는 매니를 지지하는 건 오히려 양반'이란 주장이다. 혹시 선수들이 과다 사용한 약물의 힘이 관중석까지 전이된 것은 아닐런지. 매니가 야구를 잘하고 또 다저스 팬들을 즐겁게 한 공로는 분명 크다. 그러나 야구 룰을 깨고 팬을 기만한 행위만큼은 쉽게 용서될 수 없다. 50경기 징계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매니는 청소년들의 롤 모델이자 영웅이다. 영웅의 행동은 그들에겐 교과서나 다름없다. 스테로이드의 폐해가 처음부터 지적되지 않았고 그런 시대에 산 운동선수이기에 잘 못 발을 들여 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스테로이드가 명백히 금지된 것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UCLA의 올림픽통계연구소 앤서니 부치 이사는 "사람들은 스테로이드가 얼마나 위험한 지 모른다"며 "프로 운동 선수들이 사용하는 정도의 스테로이드는 하루에 담배 4갑(80개피)을 피우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고 있다. 매니를 닮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누구나 실수는 한다. 잘못을 반성하고 재기의 의욕을 다진다면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두 번째 기회도 처음처럼 식은 죽 먹기라면 곤란하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소생해야 한다. 그래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가뜩이나 매니는 프랭크 맥코트 구단주에게만 '아임 쏘리'를 연발했다. 팀 동료는 물론이고 가장 중요한 팬들에게도 깨끗이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 아직 매니에게 면죄부를 줄 때가 아닌 것이다.